기자명작성 김지윤, 편집 이지희 매니저

北 "원칙부터 합의후 세부사항 협의하자"며 원칙 관철후 '미군철수' 등 요구

"북한은 회담할 때 보면 항상 '원칙부터 합의 후 세부사항 협상하자'고 이야기합니다. 7‧4공동성명 때도 통일 3대 원칙을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로 합의했는데 이후 세부사항을 협의하면서 자신들의 의도와 원래 계획을 드러내며 주장과 요구사항을 밀어붙이기도 했습니다. ‘자주’라고 해놓고는 그 '자주'는 다른 나라, 특히 미국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해석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식입니다. '평화' 역시 미국과 북한 간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민족대단결'도 남북 간 자유롭게 왕래하자고 해놓고 '어떻게 국가보안법을 둘 수 있느냐, 철폐해라'고 하는 거죠. 남한에서 반정부 활동을 했던 사람들을 석방시켜야 남북회담을 진행하겠다는 주장도 많이 했습니다. (원칙부터 합의하자 해 놓고 그 원칙을 자신들의 주장을 펴는 근거로 삼아) 합의사항과 다르게 북한 측에 유리하게 해석하고 이행할 것을 주장하는 행위를 많이 합니다."

'서울 불바다' 등 협박성 발언으로 위협하는 벼랑끝 전술도 북 협상전술의 특징

"북한은 또 협상을 하면서 벼랑끝 전술을 종종 펼칩니다. 김영삼 정부 때 ‘서울 불바다’ 등 협박성 발언을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특사 교환을 위한 접촉에서 북한 대표가 우리 측 대표에게 '서울에 불바다가 나면 당신들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위협적인 발언을 한 사건입니다. 상당히 논란이 됐죠. 노무현 정부 때도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에서 북한 측이 우리 측 대표가 있는 자리에서 '헤아릴 수 없는 재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해 문제가 된 적 있습니다. 벼랑 끝 전술이라고 하는데요. 북한의 특이한 협상 행태 중 하나입니다."

"되풀이 주장, 억지 주장, 지연작전 등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기도 합니다. 똑같은 내용을 계속 되풀이 주장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상대로 하여금 세뇌되도록 하고, 주장을 들어주지 않으면 억지 주장을 하고 그러는 겁니다. 말이 안 되는 내용들을 왜곡하는 등의 방식으로 회담 자체를 지연시킵니다. 특히 우리가 남북회담을 열어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심리를 적극 이용합니다. 남북 간에 약속한 회담 일정을 정치‧군사적 상황 등의 이유를 들어 본인들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파기하거나 연기 또는 중단하게 합니다. 이런 일이 빈번하게 나타났습니다." 

북한 지도자 잘못 언급하면 회담 결렬, 자신들 주장 관철안되면 '식사투쟁'도

"북한 측 대표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성역도 있습니다. 북한의 최고지도자인 김일성이나 김정일, 김정은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 남북회담 대표들이 실제로 북한과 회담할 때 주의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일례로 북한 사람들이 상의에 달고 있는 뱃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안 됩니다. 두 손으로 모시는 형태로 가리켜야 한다고 합니다. 북한의 정치제제 중 북한 당규약이나 헌법보다도 상위 규범인 ‘유일사상체계의 10대 원칙’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일적 영도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 대해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며, 권위를 훼손하는 일이 발생하면 북한 사람들이 항의를 할 수 있다는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성역을 건드리면 회담이 지체되기도 했습니다. 금강산 관광을 간사람 중 한 사람이 금강산 큰 바위에 ‘천출명장 김정일 장군’이라 적힌 것을 보고 '우리 사전에는 천출이 천한 출신이란 뜻인데 바위에 천출이라 썼느냐'고 농담으로 한 마디 했다가 엄청난 문제가 돼 남북간 오후 행사가 취소됐던 적도 있습니다. 바위에 쓰인 천출은 하늘에서 내려온 명장이라는 뜻입니다. 북한은 이 일에 대해 남한 당국 차원의 사과와 반성문을 요구하기까지 했습니다."

"개성공단 토지 임대료를 협상할 때 금액이 ‘널뛰기’ 하기도 했습니다. 투자 규모 등을 산정하는 데 있어 합리적인 경제적 산출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수준으로 금액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게 내렸다가 올랐다가 반복됐습니다. 기준이 없는 널뛰기 금액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식사 투쟁을 하기도 합니다. 남북한 회담에서 북한이 요구하는 협상 합의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남북대표단이 공동으로 식사하기로 했던 일정들을 어기고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애먹여서 목표를 달성하려는 심산이죠. 이런 태도를 여러 차례 보여서 그걸 ‘식사투쟁’이라 부릅니다. 심지어는 한국에 와서 북한으로 넘어갈 때 비행기 출발 시간을 지연시켜서 애를 먹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정을 괴롭히는 비합리적인, 비상식적인 협상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홍양호 북한연구소 석좌연구위원(전 통일부 차관)이 작년 10월 27일 재단법인 통일과나눔의 지원을 받아 사단법인 남북사회통합연구원이 주관한 '제1기 통일을 위한 협상 아카데미' 프로그램에서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 사진=남북사회통합연구원
홍양호 북한연구소 석좌연구위원(전 통일부 차관)이 작년 10월 27일 재단법인 통일과나눔의 지원을 받아 사단법인 남북사회통합연구원이 주관한 '제1기 통일을 위한 협상 아카데미' 프로그램에서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 사진=남북사회통합연구원

북한은 정전 이후 70년 동안 667차례에 걸쳐 남북간 협상에 응해 남북회담이 열렸으나, 국제정세 변화나 내부사정으로 자신들이 필요할 때는 합의를 했다가 정세나 상황이 바뀌면 합의사항을 번복 폐기하는 행태를 되풀이해, 남북간 합의문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분석이 나왔다.

홍양호 북한연구소 석좌연구위원(전 통일부차관)은 작년 10월 재단법인 통일과나눔 지원으로 사단법인 남북사회통합연구원이 주관한 <제1기 통일을 위한 협상 아카데미>에서 발표한 '남북회담의 역사'란 연구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지적하고 ”남북회담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북한의 협상 태도나 행태를 파악해서 대처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홍 전 차관은 먼저 남북협상과 회담의 역사부터 설명했다. 그는 “1971년부터 2022년까지 총 667회 남북회담이 개최됐다”며 “박정희 정부 때 111회, 최규하 정부 때 10회, 전두환 정부 때 22회, 노태우 정부 때 164회, 김영삼 정부 때 20회, 김대중 정부 때 82회, 노무현 정부 때 169회, 이명박 정부 때 16회, 박근혜 정부 때 37회, 문재인 정부 때 36회 남북회담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이후에는 한 번도 남북협상이나 회담이 없었다. 홍 전 차관은 “수치상으로 보면 노무현 정부 때 남북회담이 가장 많이 열렸고, 두 번째로 노태우 정부 때 많이 열렸다”며 "분야별로는 정치 분야가 261회, 군사 분야가 53회, 경제분야가 136회, 인도적 분야가 155회, 사회문화 분야가 62회”라고 설명했다.

1972년 5월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왼쪽)과 김일성 주석이 악수하는 모습 . 1971년 11월 20일 남북당국 간의 첫 공식 회담이 열리기까지 남북적십자회담 예비회담 등 총 11번의 실무자 간 비밀 접촉이 있었다. 이때 실무자 접촉은 각각 남북한 권력의 2인자들로 구성됐는데, 남한 측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내보냈다. 이러한 실무자 접촉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로 이어졌다. / 사진=통일부
1972년 5월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왼쪽)과 김일성 주석이 악수하는 모습 . 1971년 11월 20일 남북당국 간의 첫 공식 회담이 열리기까지 남북적십자회담 예비회담 등 총 11번의 실무자 간 비밀 접촉이 있었다. 이때 실무자 접촉은 각각 남북한 권력의 2인자들로 구성됐는데, 남한 측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내보냈다. 이러한 실무자 접촉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로 이어졌다. / 사진=통일부

 

홍양호 전 차관은 1971년부터 2022년까지 총 667회 남북회담이 개최됐다고 설명했다. 박정희 노태우 노무현 정부때 상대적으로 남북협상과 회담이 많았다. / 그래픽=김지윤
홍양호 전 차관은 1971년부터 2022년까지 총 667회 남북회담이 개최됐다고 설명했다. 박정희 노태우 노무현 정부때 상대적으로 남북협상과 회담이 많았다. / 그래픽=김지윤
홍 전 차관은 “667회의 남북회담 중 정치분야 회담이 가장 많았다”고 설명했다. / 그래픽=김지윤
홍 전 차관은 “667회의 남북회담 중 정치분야 회담이 가장 많았다”고 설명했다. / 그래픽=김지윤

냉전시대에는 대화 없다가 미-중 수교 진행되면서 남북대화도 활성화
냉전시에는 ‘대화없는 남북대결’ 데탕트시기에는 ‘대화있는 남북대결’
탈냉전시대 ‘대화와 남북협력’에서 신냉전으로 다시 ‘대화없는 남북대결’

홍 전 차관은 “국제정세와 남북한 국력 차이, 북핵 문제 등 크게 3가지 관점에서 남북회담을 살펴볼 수 있다”며 “이런 변수들을 중심으로 북한이 협상과 회담에 임하고 거부하는 패턴이 되풀이 됐다”고 설명했다.

홍 전 차관은 “그동안 남북관계 역사를 살펴보면, 국제정세 영향을 받아 기복 현상이 발생했다”며 “1960년대 말까지 냉전 시대는 남북 간에도 영향을 많이 끼쳤으며, 사실상 거의 대화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1964년 동경올림픽 대회 때 국제올림픽위원회가 남북 단일팀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중재해서 남북한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 체육회담이 열렸지만 정치적 문제로 회담이 중단됐고 그 이외에는 남북협상이나 회담이 없었다는 것이다.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지난 1971년 8월 북한에 ‘남북적십자회담’ 개최를 제안하고 있는 모습. / 사진=국가기록원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지난 1971년 8월 북한에 ‘남북적십자회담’ 개최를 제안하고 있는 모습. / 사진=국가기록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지난 1972년 7월 4일 ‘7‧4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는 모습. / 사진=조선일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지난 1972년 7월 4일 ‘7‧4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는 모습. / 사진=조선일보

 

1972년 8월 30일 평양 대동강 회관에서 개최된 남북적십자 제1차 본회담. 1천만 남북 이산가족들의 재결합을 주선하기 위해 열렸다. / 사진=통일부
1972년 8월 30일 평양 대동강 회관에서 개최된 남북적십자 제1차 본회담. 1천만 남북 이산가족들의 재결합을 주선하기 위해 열렸다. / 사진=통일부

그는 이어 “1970년을 전후해 미국과 중국 간의 긴장완화(데탕트) 흐름이 생기면서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며 “이것도 지속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정치 분야에서는 남북조절위원회, 인도적 분야에는 남북 적십자회담이 열리는 성과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북한은 이런 회담을 자신들의 대남 공산화 전략에 활용해 국가보안법 폐지, 주한미군철수 등 다양한 요구를 했고, 우리는 받아줄 수 없는 요구라 거절했다고 홍 전 차관은 부연했다. 

홍 전 차관은 “이처럼 데탕트 흐름 속에서 70년대에 남북회담이 진행됐고, 1980년대 말로 접어 들어 탈냉전이 진행되면서 남북고위급 회담이 활발하게 열렸다”며 “이 시기에 남북간에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이행됐다면 통일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북한이 국제정세가 불리할 때면 합의문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고, 우리는 미래의 통일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노태우 대통령이 1988년 7월 7일 발표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남북회담을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남한의 정원식 국무총리와 북한의 연형묵 정무원 총리가 지난 1991년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습. / 사진=평화통일시민연대
남한의 정원식 국무총리와 북한의 연형묵 정무원 총리가 지난 1991년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습. / 사진=평화통일시민연대

홍 전 차관은 “이후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때 화해협력 분위기에서 많은 회담이 열렸고 문재인 정부 때도 평화 프로세스 속에서 많은 회담이 열리고 정상회담이 열렸다”고 설명하고 “하지만 2020년대 초부터 신냉전이 시작되면서 남북회담이 중단됐다”고 말했다. 미-중 패권경쟁이 진행되고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면서 러시아 중국과 연대하게 됐고, 우리는 미국, 일본과 연대하는 등 신냉전 체제가 만들어지면서 다시 남북회담이 중단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전체적으로 보면, 냉전시에는 대화 없는 남북 대결, 데탕트 시기에는 대화 있는 남북 대결, 탈냉전 시기에는 대화와 남북협력이 있었다가 신냉전으로 다시 대결 구도로 돌아가는 큰 흐름을 이해하면 좋겠다”고 정리했다.

상대적으로 우세할 때 적극 공세, 국력우세 역전되자 체제 방어 차원서 회담 응해
남북협력으로 경제난 해소하면서 내부 자원은 핵개발에 나서는 이중적 태도 보여 

홍 전 차관은 두번째로 남북한 국력차이와 남북관계를 설명하면서 “그동안 남북 관계 역사를 살펴보면 남북한은 국력이 우세할 때 공세적인 태도를 보였던 경향이 있다”며 “국제사회도 마찬가지지만 국력이 우세한 쪽이 열세한 쪽에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1960년대 말까지는 북한이 사실상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대남 공세가 많았다. 군사적인 접근도 그랬다. 그러다 1970년대 초쯤 남북한이 대등해지면서 상호 공세적이게 됐다. 이때는 남북한 1인당 GNP가 비슷했다. 남북회담이 자주 열리게 된 배경도 여기에 있다.

1980년대 말부터는 남한이 상대적으로 우세해졌다. 특히 노태우 정부 때 북한에 대해 여러 교류협력 사업과 남북회담을 공세적으로 하고 나섰다. 북한은 국제정세 위기를 느끼고 자기체제 방어를 위해 불가침 조약을 내세우며 군사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 비핵화 등 협력적 공존이 많이 진행된 시기다. 당시 북한은 경제난이 심했기에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 제시된 회담을 활용했다. 동시에 내부 자원을 활용해 북한 핵 개발에 나서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필요할 때는 협력적 공존, 아닐 때는 냉전적 공존을 하는 양상을 보였다.”

홍 전 차관은 세번째로 북한 핵개발과 남북관계를 설명하면서 “1980년 말 북핵 문제가 발생하면서 핵을 해결하는 게 주요 이슈가 됐다”며 “북핵문제 초기 단계에서는 북한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적 기대로 남북관계가 운영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정부(등 보수정부)는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북 간에 실질적‧경제적 이익을 주는 경제협력과 핵 포기를 연계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반면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등 진보정부)는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협력을 병행해서 북한에게 이익을 줌으로써 핵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정책적 판단을 했고, 그런 것들이 남북관계 회담에 영향을 주었다고 홍 전 차관은 분석했다.

그는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에 남북 관계가 긴장되고 대결 국면으로 가고 또 진전되는 이런 일들이 되풀이 됐다”며 “그것은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그리고 문재인 정부 또 앞으로 윤석열 정부 때도 똑같은 패턴으로 나타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일성때는 남조선 무력통일 위한 대남통일전략으로 적극 공세
김정일은 경제난 극복과 체제생존 위해 ‘실리적 대남전략’ 활용
김정은은 북한체제와 정권 유지를 위해 핵개발 하면서 자력갱생전

홍 전 차관은 끝으로 북한 정권에 따른 남북관계 변화를 설명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시대별로 기본적인 대남 전략의 차이가 있다. 김일성 시대때는 대남 통일전략으로 대남공세를 펼쳤다. 6.25 전쟁을 통해 무력 통일을 시도하다 안 되니까 그 이후로 통일전선 전략 전술을 통한 남조선 공산화 혁명을 시도했다. 이후에는 주한미군 철수를 통한 베트남식 공산화 통일을 기도했고, 결국에는 남북연방제 통일을 외치게 됐다. 이 흐름에 맞춰 시기별로 남북회담이 열렸다.

김정일 시대로 접어 들면서는 경제난으로 인한 고난의 행군시기를 거치면서 체제 생존을 위한 전략을 펼쳤다. 체제보존과 경제 회생에 집중하기 위해 대남사업을 ‘실리전략’으로 활용했다. 남한으로부터 쌀, 비료, 전기, 원자재 등을 획득하기 위해 남북대화에 협력하고 추진한 것이다. 이중 전기가 상당히 중요한 전략물자였지만 주지는 않았다. 쌀 지원은 차관 형태였지만 무상으로 준 거나 다름없다. 

김정은 시대 이후에는 북한 체제와 정권 유지를 위해 남한을 상대로 군사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1차적으로 북한 체제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핵을 그 수단으로 사용했다. 2013년 ‘경제 건설 및 핵무력 건설 병행전략’을 통해 4차례 핵실험을 진행하고 ICBM 발사 등을 통해 2017년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그러다 2018년부터는 ‘경제건설총력 집중전략’으로 전환하고 북핵카드를 바탕으로 3차례의 남북정상회담, 2차례의 북미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이 역시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었으나, 2019년 2월 29일 하노이 노딜 회담으로 완전히 실패했다. 김정은은 이후 새로운 전략으로 ‘자력갱생전’을 통한 정면 돌파전을 펼치고 있다. 핵무기 고도화를 위해 미사일 기술도 계속 고도화하고 있다.” 

쟁점도 시기별로 차이, 냉전시엔 한반도공산화 전략따른 정치 군사문제 집중 제기
탈냉전 이후엔 체제방어적 주장에 집중하며 경제난 극복위한 실리확보에 주력

홍 전 차관은 “남북회담의 주요 의제나 쟁점들도 시기별로 차이를 보인다”며 “냉전 시대때 북한은 정치‧군사 문제가 우선적으로 해결돼야 남북관계가 해결되고 통일로 진전될 수 있다는 한반도 공산화 전략에 따라 정치‧군사문제 우선 해결에 중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그는 “반면 우리는 기능주의 통합이론에 따라 인도적 분야에서 경제‧사회문화 분야 나아가 정치‧군사 분야 순으로 단계적 접근하는 방식을 취했다”며 “서로 상반된 입장을 가졌기 때문에 회담 진전이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북한은 외세간섭 없는 자주통일, 연방제 실시, 민족통일협상회의 소집, 남한의 국가보안법 철폐, 주한미군 철수,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지, 조미 평화협정 체결, 반정부인사 탄압 중지 및 석방 등 정치‧군사적 문제를 제기했는데, 모두 한반도 공산화 전략, 남조선 혁명 전략에 따른 접근법이었다는 것이다.

홍 전 차관은 “탈냉전 시기, 특히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체제 방어적인 주장을 많이 제기했다”며 “그런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남으로부터 경제적 실리를 확보하는데 주력했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화해협력 정책 기조에 따라 경제‧사회문화 분야 교류 협력을 지속하면서 군사 분야에서의 진전, 특히 군비 통제에 집중했는데, 북한은 체제 안보를 위해 군사 분야에서는 소극적 태도를 취하면서 ‘우리민족끼리’ 주장아래 외세 배격과 당사자 해결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남북간 경제협력 회담의 성과인 개성공단 전경.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 북한의 대남도발로 우리 정부가 철수 결정을 한 뒤 지금은 활동이 중단돼 있다. / 사진=뉴스1
남북간 경제협력 회담의 성과인 개성공단 전경.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 북한의 대남도발로 우리 정부가 철수 결정을 한 뒤 지금은 활동이 중단돼 있다. / 사진=뉴스1

홍 전 차관은 남북협상과 회담의 결과물인 합의서와 관련, “그동안 많은 남북회담을 통해서 남북 간에 여러 가지 합의서가 나왔는데 모두 258건에 이른다”며 “1971년부터 2022년까지 정치 분야 71건, 군사 분야 14건, 경제 분야 112건, 인도적 분야 36건, 사회문화 분야 25건 등이 체결됐다”고 말했다. 역대 정부별로는 박정희 정부 때 13건, 최규하 정부 0건, 전두환 정부 1건, 노태우 정부 26건, 김영삼 정부 5건, 김대중 정부 52건, 노무현 정부 123건, 이명박 정부  2건, 박근혜 정부  13건, 문재인 정부  23건이 체결됐고, 윤석열 정부 출범후는 아직 없다고 홍 전 차관은 설명했다.

그는 “주요 합의서를 살펴보면 먼저 19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 발표된 ‘7‧4 남북공동성명’이 있다”며 “남북회담의 물꼬를 본격적으로 튼 합의서라 할 수 있는데 지금은 합의내용이거의 하나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홍 전 차관은 “두 번째로 주요한 합의서는 1992년 2월 19일 발효된 남북기본합의서”라며 “남북간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로 통일 및 남북관계의 기본 장전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평가된다”고 말했다. 핵문제 해결을 위해 채택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남북공동선언’도 그때 체결된 합의서인데, 이 합의서는 무효화된 지 오래 됐다는 것이 홍 전 차관의 설명이다..

홍 전 차관은 “이후 지난 2000년 김대중 대통령시절에 체결된 ‘6‧15 남북공동선언’, 노무현 대통령 때 이뤄진 ‘10‧4선언’,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4월 27일 체결된 ‘판문점 선언’ 등이 있다”며 “이런 합의들은 지금 북한이 거의 하나도 지키고 있지 않아 사문화된 상태”라고 지적했다. 

사진 왼쪽부터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6ㆍ15남북공동선언을 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위원장.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10‧4선언을 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에서 판문점 선언을 한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 사진= SBS KBS 화면캡쳐, 뉴스1
사진 왼쪽부터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6ㆍ15남북공동선언을 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위원장.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10‧4선언을 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에서 판문점 선언을 한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 사진= SBS KBS 화면캡쳐, 뉴스1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는 역사적 과제, 회담 일꾼 키워 지혜롭게 대처해야”

홍 전 차관은 발표를 마무리하면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라는 민족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내심을 갖고 북한과 지속적으로 대화를 추진해야 한다”며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는 말을 새겨 북한을 잘 아는 ‘대북협상 일꾼’을 육성하는 국가 차원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홍 전 차관의 강의 전문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dhZUjn-0av7-nBZ7gdzcyGNrvxWaV2s2/view?usp=sharing